가보지 못한 이 에게도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곳이다

인도는 가본 이 에게도 가보지 못한 이 에게도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곳이다. 넓은 대지와 많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곳이기에 그만큼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가 넘치는 땅 이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인도는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아끼고 있던 미 여행지였다. 지금까지 2개월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디로 여행 가겠냐고 누가 물어보았을 때, 나는 거침없이 인도라고 대답해왔다. 며칠씩 남는 시간이 짬짬이 있어왔건만 인도만큼은 그 정도의 시간으로 이해하거나 여행하기에는 미안한 곳이었기에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 현실의 삶에 있어서 온전히 1개월 이상의 시간을 비우는 것이 어려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사회인으로 동화되어 가는 내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내 관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생각은 이번 여행에 동행한 두분의 선배님도 비슷하게 느끼셨으리라.. 1999년 4월3일 트래블 게릴라 대원인 강문근,김형렬(사모님도 함께),김슬기는 ‘용서의 땅’ 인도로 떠났다. 강문근선배, 김슬기는 이번이 엄밀히 초행길이었고,(경유한 적은 있었음) 김형렬선배는 2년전의 북인도 여행후 2번째의 남인도 방문이었다. 나를 제외한 두분은 직장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전형적인 도시 사회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10일 이상의 휴가를 내기는 어려웠고, 나 역시 그 이상의 시간을 내기는 무리한 상황이었다. 떠나기 전까지 사소한 사건들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았으나 결국 우리는 떠나는데 성공했다. 여행은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이었는가도 함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두분 선배님의 여행길에 나는 주저 없이 동행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동시에 작년에 결성된 ‘트래블 게릴라’의 두 번째 답사여행의 성격도 부여했음은 물론이다. 원하는곳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출발일, 공항에서 일행들을 만났을 때 진정으로 나는 행복했다. 우리들은 일본의 ‘ANA'(흔히 ‘아나’라고 읽고 있지만, 이 회사의 관계자들은 ‘아나’라는 말을 싫어하는데, ‘아나’라는 말은 일본어로 ‘구멍’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에이엔에이’ 혹은 항공사의 두자리 약어인 ‘NH’로 불리길 원한다.)를 이용하여 오사카에서 1박후 인도의 ‘뭄바이’로 도착하고 출발하는 항공권을 준비했다. 인도에 도착하기 앞서 우리는 살인적인 물가의 일본에서 하루를 체류하여야만했고, 훗날 일본에서 지출한 여행경비가(약12,000엔) 인도에서 사용한 전체 여행경비와 거의 맞먹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현재 오사카의 국제공항은 오사카의 남쪽항구 앞바다를 매립한곳에 만든 간사이(關西) 공항이다. 시내에서부터는 약 1시간 이상 떨어져있으며, 크게 오사카의 북쪽 중심가인 ‘우메다(梅田)’지역에서는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남쪽의 중심지인 ‘난바’ 지역 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우리는 미리 마음먹고 간 1박 2인1실인 ‘링카이’호텔에 묵었다. 링카이 호텔은 오사카의 ‘난바’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난카이센 ‘이시주가와’역 바로 앞에 위치해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1인 3250엔 정도로 비교적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숙소를 잡은 후 우리는 난바 중심지로 나갔다. 시간상 많은곳을 볼 수는 없었고, 난바근처의 유명한 전자제품 상가인 ‘덴덴타운’과 먹자골목인 ‘도톰보리’, 패션가인 ‘신사이바시’, 일본 속의 미국을 잘 느낄 수 있는 쇼핑가인 ‘아메리카 무라(村)’등을 둘러본 후 짧은 오사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날 연결 편으로 그나마 인도의 국제공항 중에는 시설이 제일 좋다고 하는 인도의 뭄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수속과 환전을 마치고 공항로비로 나온 우리들은 웃음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공항청사밖으로 빠져나가는데도 애를 먹었다. 우리들을 환영(?)나온 인파들을 헤치고, 걸어가가는데도 꽤 힘들 정도 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뭄바이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약 15시간이 소요되는 해변 휴양지 ‘고아’였다. 떠나기 전 고아로 당일밤 고아로 연결되는 교통편을 조사하였으나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우리들은 우선 뭄바이공항에서 시내 남쪽의 중앙 역인 ‘빅토리아 터미너스’까지 260루피의 미리 요금을 지불하는 ‘Prepaid Taxi를 타고서 이동했다. 조사한 바로는 밤 10시30분에 고아로 출발하는 야간열차가 있는 걸로 되어있어, 역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열차는 있었지만 우리가 원하는 2등석 침대차의 자리는 매진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일반석인 ‘General Compartment’의 자유석(149루피)을 끊은 후, 역안의 짐을 들어주는 포터들에게 약간의 용돈을 주고는 G. C칸의 자리를 부탁했다. 출발시간을 약 30분을 남겨놓고 우리를 태우고 갈 열차는 지정되어있는 플랫폼으로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승객들이 정말로 벌떼처럼 기차의 출입문에 매달려 미처 열차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입구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매달리는 형상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는 지정좌석이 없는 G. C의 객차 안의 좋은 자리를 서로 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포터들에게 임무를 주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사람들이 객차에 매달리는 장면을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할 수가 있었다. 포터들은 노련한 솜씨로 객차에 매달려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발빠르게 우리들의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러나 위의 두칸은(위아래로 침대가 있고 통로 쪽으로 좌석이 일렬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온전히 차지했건만 아래의 두칸은 나중에 들어온 여행객들과 함께 앉아오게 되었다. 아래의 자리는 독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우리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열차는 남쪽으로 달리고 달려서, 다음날 오전 11시쯤 우리의 목적지인 고아의 ‘안주나’ 비치에서 가까운 올드고아의 중앙 역(Karmali)에 내릴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합승택시(4인,300루피)를 타고 올드고아를 벗어나 ‘고아주’의 중심지인 ‘빤짐'(Panaji)을 거쳐, 조용한 ‘안주나 비치’까지 올 수 있었고, 깨끗하고 전망 좋은 ‘안주나 비치 리조트’라는 2인1실의 숙소를 250루피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다. 이방은 성수기인 12월에서 1월사이에는 600루피까지도 비싸진다고 한다. ‘고아주’는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 휴양지로서 1510년부터 1961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 이 지역 곳곳에는 성당과 그들이 세운 방어요새등 포르투갈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유럽의 배낭여행자들에게 아주 각광을 받는 한적하고 자유로운 해변이었으나, 현재는 예전의 한적함은 잃어버린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세계의 많은 배낭 족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고, 고아는 10여개가 넘는 해변들을 가지고 있고 각 해변마다 분위기가 사뭇 달라 자신에게 알맞은 분위기의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배낭여행자들에게 유명한 ‘안주나 비치’는 해안으로서는 오히려 부근의 ‘바가토르’비치나 ‘바가’, ‘깔랑굿’에 비해 떨어지지만, 값싼 숙소가 모여있어, 인기가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배낭여행자는 이곳에서 묵으며, 스쿠터나 오토바이를 빌려 주위를 둘러보는 편이다. 기어변속이 필요 없는 스쿠터는 24시간에 150루피, 기어변속이 필요한 100cc이상의 오토바이는 24시간에 250루피정도의 가격이다. 휘발유는 1리터에 30루피이며, 일반 상점에서 쉽게 살 수 있다. 우리들의 의견으로는 ‘고아’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되도록 오토바이를 직접 빌려 타고 다닐 것을 권한다. 기어가 없는 ‘스쿠터’는 초보자도 약간의 연습만 하면 충분히 탈 수 있고, 면허증이 없어도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다. ‘안주나’비치에서 다른 비치로 가기 위해서는 이렇듯 직접 오토바이를 빌리는 것이 좋지만, 운전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오토바이 영업택시를 흥정하여 하루 대절하여 다니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비용 면에서 직접 빌려 타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일반버스들은 근처의 도시인 ‘맙사'(Mapusa)와 ‘빤짐'(Panaji)을 운행하지만, 각 비치사이들을 직접운행하는 일반버스들은 없으며, 어느 한 비치에서 우선 ‘빤짐’등 도시로 나가서 우회해 들어가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한다.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일정에 꽉 짜여진 생활을 하던 우리들은 멀고먼 길을 날고, 달려 고아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고아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진정한 자유를 누렸다. 자고싶은대로 자고, 먹고싶은대로 먹고, 가고싶은대로 가고, 이렇게 즐겨도 하루 생활비는 기껏 10불에서 15불사이면 충분하다. 뜨거운 햇살 속에서 하루종일 돌아다닌 후 우리들은 숙소로 돌아와 먼지와 땀을 씻어내고,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쉰후 근처 배낭여행자들의 집합소라고 소개받았던 바가토르 해변 근처의 ‘Prim Rose’ Restaurant & Bar에 가서 인도에는 어울리지 않은 ‘테크노’뮤직을 들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이틀동안 강문근 선배와 나는 스쿠터를 빌려, 근처의 해변 및 포르투갈 점령시 1717년에 만든 ‘차포라'(Chapora)항구 및 요새, 깔랑굿의 해변 및 요새 등을 답사하고 촬영했다. 고아에서 우리들이 많이 먹었던 음식으로는 ‘Fish Curry Rice’,와 볶음밥류, 과일주스등이었는데, 한끼의 식사비로 평균 70루피정도 지출한 것 같다. 또한 더운 날씨이므로 물을 많이 마셨는데, 1리터 짜리 생수 한 병이 약 12루피정도 이었다. 이 물을 하루에 평균 두병씩은 마셨다. 이틀간의 꿈같은 휴식을 끝낸 우리는 원래 각자가 목표했던 여행지로의 이동을 위해 잠시 헤어졌다. 그날은 마침 일주일에 한번씩 ‘안주나 비치’에서 열리는 유명한 ‘Flea Market'(벼룩시장)이 서는 날이어서 오전 중에는 이 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현지인 들은 물론이고, 고아에 체류하는 거의 모든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장은 생각보다 아주 크게 열리는데, 그날 장이 끝난 후 배낭 족들끼리의 큰 파티가 밤에 열렸다고 한다. 나는 불교석굴벽화로 유명한 ‘아잔타’와 힌두교, 불교, 자인교의 석굴이 있는 ‘엘로라’를 가기 위해 ‘아오랑 가바드’로 이동했고, 김형렬선배와 사모님은 많은 ‘아쉬람'(명상센터)들이 있는 ‘뿌나'(Pune)로 이동했다. 강문근선배는 ‘고아에 계속 체류하면서, ‘꼴바’ 해변등 좀더 심도 있는 고아를 즐겼다. 아오랑가바드, 아잔타, 엘로라 고아에서 아오랑 가바드로 가기위한 방법은 크게 두가지였다. 고아의 ‘맙사'(Mapusa)에서 ‘뿌나'(Pune)까지 버스로 이동한다음 뿌나에서 아오랑 가바드로 가는 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갈수있었고 소요시간은 고아/뿌나가 약, 4시간 뿌나에서 아오랑 가바드까지 약 6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약 500루피) 그러나 중간에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과 고르지못한 도로사정으로 소요시간은 정말로 예상시간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하나는 비행기를 타는것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없었던 나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고아에서 뭄바이까지 일단 가서 붐바이에서 아오랑가바드 왕복을 타기로 했다 총 3번의 국내선 이동이었다. 인도에는 만30세 이하에게는 항공요금을 할인해주는 제도가 있는데, 내 나이가 만으로 아슬아슬하게 30세에서 몇 개월 모자라는 관계로 총 3구간을 U$155에 살수있었다.(Indan Airline) 다행히 좌석은 있었고 안주나 비치의 숙소앞에 있는 조그만 여행사에서 직원들의 친절한(?) 안내로 무사히 표를 구입했다. 아오랑 가바드로 가기전 내가 알고있던 사전정보에 의하면 아오랑 가바드 시내의 ‘MTDC'(마하라쉬트라 주 관광청)에서 진행하는 ‘아잔타”엘로라’ 일일 투어가 각각 있다고 했고. 그 투어의 출발장소는 역시 ‘MTDC’에서 운영하는 숙소인 ‘Holiday Resort’에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오랑 가바드에서 일반버스를 이용하여 ‘아잔타’나 ‘엘로라’를 좀더 저렴하게 찾아가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지만 나의 경우는 시간여유가 없었기에, 짧은시간안에 충분한 현지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좀더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하여 일일투어를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따라서 우선 나의 일차 목적지는 아오랑 가바드 중앙 역 부근의 ‘MTDC Holiday Resort’였다. 이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역시 내가 원하던 일일투어도 차질 없이 매일 출발하고 있었다. 아오랑 가바드의 도착첫날은 Holiday Resort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 우리를 태우고 갈 ‘MTDC’소속의 버스가 Holiday Resort 사무실 앞에 서 있었고, 미리 예약을 했던 여행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날씨는 매우 더웠고 간밤 더위로 인해 잠을 설친 내 머리는 무거웠다. 고아에 있었을 때는 그렇게 더위를 몰랐는데, 이곳에 오니 정말 인도의 더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버스 안에는 약 25명의 승객들이 있었는데, 노르웨이 아저씨, 독일 아저씨, 일본인 남학생 두명, 이탈리아 아가씨 2명, 그리고 김슬기, 나머지는 모두 인도인들이었다. 인도인들은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그 분위기가 우리와 너무 닮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말과 문화가 틀리지만 사람사는곳은 어디나 같은 것 같다. 시간이 좀 흐르니 이곳이 인도라는 사실과 내가 지금 한국인들과 있는 건지 인도인과 있는 건지가 모호해져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와함께 첫날 아잔타 투어를 함께 했던 인도인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정이 많고, 남에 대한 배려를 할줄아는 전형적인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내 옆자리에는 노르웨이 아저씨가 앉았는데, 나이는 43살이고 이름은 ‘젤’이란다. 인도를 벌써 6개월째 여행중인데, 사업을 겸하는 여행이라고 한다. 이분은 인도의 문화유산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이동 경로라던가 3국의 역사적인 면에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잔타로 가는 3시여 간 동안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하여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윽고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를 한번 들리고는 아잔타 동굴에 도착했다. 일일투어에는 왕복 교통비, 영어가이드, 입장료, 가 포함되어 있었고, 식사만 불포함이어서,(엘로라도 동일) 아잔타동굴의 입장료를 따로 사지는 않았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동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척 점잖은 아저씨였다. 그는 영어로 이야기하던 중간에 간간이 그들의 말인 ‘힌두어’를 섞어가며 영어에 불편한 인도인들을 위해서도 배려했다. 그러나 우리 팀의 인도인들은 거의 영어를 아는 것 같았다. ‘아잔타 동굴군’은 인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아오랑가바드에서 북쪽으로 약 104Km떨어져있으며, 수도승들의 수행장소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굴은 입구의 1번 동굴에서부터 가장 안쪽인 29번 동굴까지 반달형의 계곡을 끼고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동굴은 B. C 2세기에서 A. D7세기까지 건설되었다고 하며 여러 종교의 석굴이 섞여있는 ‘엘로라’와는 달리 모두가 불교동굴로 이루어져있다. 8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가 점차로 쇠퇴함에따라 이 아잔타 동굴군은 수 백년간 잊혀진 장소가 되었다가 1819년 영국인 병사에의해서 재 발견되었다고 여러책 에서는 밝히고 있지만 100% 믿기는 어려웠다. 각 동굴 안에는 흡사 우리 나라의 백제나 고구려의 왕릉 등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프레스코'(바위 위에 회반죽 등의 바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짐승의 털로 만든 붓과 천연안료등을 사용해 그린 벽화)화 기법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불화’ 등을 볼 수 있었으며, 각 석굴의 내부는 역시 경주의 석굴암을 연상케하는 건축구조를 볼 수 있었다. 불상의 배치를 중심으로 각벽과 천장, 기둥에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조각과 부조 등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닳고, 바래어진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해는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B. C 624년경이라고 알려져있으며,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있다. 생전의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을 경배하지 말 것이며 자신의 형상을 닮은 숭배 물을 만들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지는 지켜지지 않았고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불교’라는 종교로 남아있으며, 우리의 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의 고행하던 모습을 본뜬 ‘불상’이라는 조형물이 부처님의 사후 약 400년후부터 나타나게 된다. 아잔타 석굴의 8번에서 12번 사이의 동굴들의 내부에는 그래서 불상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가장 초기(히나야나 Hinayana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중 10번 동굴이 아잔타의 동굴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현지 가이드는 아잔타 석굴의 입구를 들어서 중앙까지 쭉 걸어 들어간 다음 가장 먼저 19번 동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동굴은 아잔타 동굴에서도 특이하고도 유일하게 동굴외벽에 힌두교의 상징물인 ‘나가'(NAGA, 7개의 코브라 머리를 가진 왕)가 그의 부인상과 함께 부조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행인 인도인 가족들은 동굴입구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19번 동굴과 더불어 26번 굴에는 입구 왼쪽에 유명한 부처님의 ‘와상’이 커다랗게 부조되어있다. 이 동굴들은 후대( 마하야나, Mahayana 시대)의 것들이다.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두어 개의 동굴들을 더 들리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벽화가 있는 동굴인 1번 동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더불어 1번 동굴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동굴이라고 한다. 이 동굴에는 흡사 일본 ‘나라’의 법륭사(호오류지)에 있는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와 매우 비슷한 벽화가 남아있다. 이름하여 ‘빠담빠니(Padampani) 보살상이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희미한 조명아래에 비춰지는 이 보살상의 신비로운 미소는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정면과 왼쪽, 오른쪽에서 각각 바라볼 때 미묘한 표정변화를 볼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우리들은 소란스럽게 이리 저리로 옮겨다니며 벽화를 감상했다. 사실 이 벽화는 사진 및 비디오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관리인의 눈을 피하여 가지고 갔던 디지털 비디오에 담아올수 있었다. 무덥고 힘들었던 동굴 투어는 끝이 나고 오후2시경 점심식사 시간에 우리는 매표소 입구에 있는 ‘MTDC’식당에서 25루피(약 800원)짜리 인도음식인 ‘탈리’로 배를 채웠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무더운 날씨로 인해 지친 몸을 쉬면서 내일의 투어를 걱정하였다. 버스 안에서 사귄 노르웨이 아저씨, ‘젤’에게 그가 묵고있는 숙소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Great punjab’이라는 호텔인데, 가격과 시설 면에서도 여러모로 어젯밤 묵은 M.T.D.C의 숙소보다 나은 것 같아 두 번째 밤은 그리로 옮겨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 ‘MTDC’ 안에 있는 ‘Kailas’Restaurant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9시30분에 출발하는 엘로라행 투어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여행객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누가 내 옆자리에서 말동무가 되는가하고 궁금하였다. 잠시후 일본인 같은 동양인이 내 옆에 앉기에 인사하니 (버스는 지정좌석제) 태국출신의 미국적자로 이름은 ‘제리’라고 했다. 이 친구도 역시 인도를 6개월 여정으로 여행중인데, 4개월을 이미 소비한 상태였다. 역시 이 친구와 투어 내내 함께 다녔음은 물론이다. 날씨는 전날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나와 제리는 하루 종일 약 2리터 가까운 물을 각각 마신 것 같다. 인도에 처음 도착해서는 배앓이를 걱정하여 길거리에서 파는 음료수 등을 못 먹었으나, 이 ‘제리’라는 친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우리네 상식으로도 불량식품처럼 보이는 길거리의 ‘라임을 섞은 얼음물’, 사탕수수를 짠 과즙’,등을 보이는 대로 사 먹어댔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어 이 친구를 따라 길거리의 불량식품(?)들을 몇 번 사 먹었지만, 별다른 탈은 없었다. 엘로라 투어는 전날의 아잔타 투어와는 다르게 여러 곳의 근처 유적지들을 들렸는데, 엘로라로 가는 길에 들린 ‘다울라타바드’는 1187년 ‘야다바’왕조의 수도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4세까지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특히 1327년 술탄 ‘모하메드 투글라크’에 의해서 당시 수도였던 ‘델리’로부터 이곳으로 약 17년간 수도를 옮긴 적이 있었다. ‘다울라타바드'(Daulatabad),’는 바로 그 당시의 유적지이며, 이곳에 오면, 방어시설이 잘 되어있는 성곽과 약 7km의 사정거리를 지닌 대포, 옆으로 우람하게 서있는 60m높이의 승전 탑인 ‘찬드 미나르’도 볼만하다. 더불어 이들 유적지들을 보기 위해 묵는 중심도시인 ‘아오랑 가바드’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던 무굴의 황제 ‘아오랑제브’의 아들인 ‘아잠 샤’가 그의 어머니인 왕비 ‘베굼’의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1650년부터 7년간 건설한 ‘비비 카 막바라'(Bibi Ka Maqbara)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감히 그곳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웅장한 위용과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이밖에도 몇 개의 힌두사원과 이슬람사원도 들렸다. 엘로라 동굴 군은 모두 34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다. ‘아잔타’석굴이 B. C 2세기에서 A. D7세기까지에 이루어진 건축물인 반면 ‘엘로라’는 그 이후인 A. D 7세기부터 조성되었다고 한다. 아잔타를 건설하던 손길이 갑자기 아잔타를 내버려두고 엘로라 지역으로 옮겨왔다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왜 아잔타를 내버려두고 이곳으로 옮겼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한다. 아잔타가 모두 불교동굴인 반면 이곳 엘로라는 1번부터 12번 동굴은 불교사원, 16번부터 29번까지가 ‘힌두사원’, 30번부터 34번까지는 ‘자인사원’으로 되어있다. 이곳의 동굴들 중에서 가장 압권은 히말라야에 있다는 ‘시바(Shiva)신의 거주지 ‘카일라사나트(Kailasanath)’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힌두사원인 16번 동굴이다. 서기 756년부터 ‘라쉬트라쿠타'(Rashtrakuta)왕조가 100여년이 넘는동안 수천 명의 장인들을 이용해 깎아서 만들었다고 알려져있다. 이 석굴사원의 높이는 33m, 넓이는 47m, 길이는 81m의 규모로서 거대한 하나의 바위산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원 안에는 역시 수많은 조각상과 부조들이 힌두교와 여러 신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데, 개인적으로 찾아가더라도 꼭 가이드가 동행하는 단체 여행 단의 뒤를 따라다니며 귀동냥이 필요한곳이다. 더불어 인도의 여행을 아무래도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출발전 꼭 힌두교 및 인도의 종교들, 예컨대 시크교, 이슬람교, 배화(조로아스터)교, 와 관계된 서적을 몇 권 참고하여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도는 현재 각 ‘주’별로 믿는 주요종교들이 나뉘어져 있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인도를 지배했던 왕조별로 종교가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사원을 이해하려면 필히 이들 종교들에 대해서 상식수준이라도 알고있어야 되는 것이다. 힌두교와 자인(자이나)교는 모두 인도의 자생종교로서, 힌두교와는 달리 자인 교는 인도지역 내에서만 소수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힌두교가 불교보다는 그 역사가 더 오래된 반면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부처님조차 그들의 신인 ‘비슈누'(재창조와 유지의신)의 9번째 화신(Avatar)이라고 한다.) 자인 교는 불교의 발생시기와 거의 때를 함께 한다. 지면 관계상 인도의 종교에 관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느끼게 되는 여러 가지중의 하나가 바로 이 종교문제이다. 인도에는 현재 세상의 주요한 종교는 모두 들어가 있다. 이중 이슬람교와 카톨릭은, 수입이 되었고, 힌두교와 불교 등은 수출된 종교들인것이다. 투어를 마치고 아오랑 가바드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에게는 힌두교보다는 불교가 더 친숙한 종교이겠으나, 인도인들에게 절대적인 종교는 역시 유구한 역사를 인도인들과 함께한 힌두교라 하겠다.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여행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힌두문화에 비교적 친숙해져 돌아오는데, 신앙을 떠나서 여행자가 인도에서 느끼는 인도문화에 대한 경외심이 바로 힌두교와 함께 숨쉬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에 근세에 한국에 수입된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서구화시키는데 큰(?)이바지를 했고, 한국의 발전모델을 서구의 선진국에 맞추는데는 성공한 것 같다. 그 결과 경제력에서는 과거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비록 I. M. F를 겪고있지만) 인도에서도 일본인 다음으로 대접(?)받는 여행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의 정신문화는 못살던 시절보다 더 잃은 게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한국인들의 정신을 지탱해주는 사상이나 종교가 뭔가?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없는지..? 나의 自我, 우리들의 진정한 自我를 찾고싶다. 이번 아오랑 가바드, 아잔타, 엘로라 여행에서 얻은 생각이다. 그리운 얼굴들 각자의 여행을 위해 3일간 헤어져있던 우리일행들을 뭄바이의 ‘Gate of India’앞에서 다시 만난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오후였다. 모두들 피곤했지만 건강한 모습들이었다. 특히 강문근 선배는 고아에서 얼마나 오토바이로 다니셨는지, 새카맣게 타서 웃을 때 이만 하얗게 보였다. 김형렬선배는 푸나의 ‘오쇼아쉬람’을 견학하고 2년전 북인도 여행시 만났던 인도인 친구 분들을 만나고 오셨다. 우리들이 만난 ‘인도의 문'(Gate of India)은 1911년에 영국의 왕인 George 5세 내외가 봄베이(뭄바이)를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기념물이다. 약간 옆으로 퍼진 듯한 건축물 주변으로는 근처의 명승지인 ‘코끼리섬'(Elephants Island)으로 가는 유람선들의 선착장도 함께 붙어있었다. 어릴 적 유명한 소설이었던 80일간의 세계일주에 이 봄베이의 선착장이 나온다. 인디아 게이트가 서있던 자리가 예전에는 유럽과의 뱃길을 연결했던 항구라고 한다. 그러나 예전의 분주했던 흔적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바로 옆에 뭄바이에서도 최고의 방값을 자랑하는 ‘타지마할 Taj Mahal 호텔이 고풍스러운 자태를 자랑하며 서있다. 우리들의 재회장소를 이 곳으로 정했던 이유는 배낭 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값싼 숙소의 거리인 꼴라바 Colaba 지역이 바로 이곳 이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유명 가이드북이나 론리플래닛 인도편, 그 밖의 수많은 여행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은 배낭 족들이 물가 비싼 뭄바이에서 그나마 잘 만한 숙소를 구하기에 유리한 지역이라고 추천되어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구세군 회관( Saivation Army Red Shield)이 사전 정보로는 ‘다인실’인 도미토리가 아침식사 포함 1인 100루피라고 알고 있었으나,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140루피였다. 인도의 더위에 지친 우리들은 저렴한 곳도 좋았지만 여행의 막바지 이었으므로 에어컨이 있는 방을 원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VolgaⅡ’라는 숙소였다.(필자가 뭄바이에 도착하기전 강문근 선배가 미리 도착하여 잡아놓고 있었음) 에어컨과 화장실이 붙어있고, 2인1실에 600루피였다. 이 가격에 이 정도의 시설이라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방도 깨끗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꼴라바 지역에서 가장 비싸고 유명한 레스토랑인 ‘레오폴드 Leopold’건물의 2층에 있었다.